달리기는 익숙해지면 자동화되는 동작입니다. 발을 어디에 디딜지, 팔을 어떻게 흔들지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해요. 이때 뇌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과제 수행 모드가 한가해지면서, 기억과 생각을 자유롭게 연결하는 모드(연구자들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 부르는)가 켜지는 거예요.
샤워할 때, 설거지할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다만 러닝은 여기에 혈류 증가와 각성이라는 부스터가 붙어요. 뇌로 가는 산소가 늘어난 상태의 멍때림. 이게 러닝식 생각의 정체입니다.
이 효과를 의도적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요령은 문제를 억지로 풀면서 뛰는 게 아니라, 출발 전에 문제를 한 번 떠올려두고는 잊는 거예요. '이직할까 말까' '그 기획의 빠진 조각이 뭘까'를 화두처럼 챙겨서 나가되, 뛰는 동안은 그냥 뜁니다.
중반쯤 지나 몸의 리듬이 잡히면 생각이 저 혼자 그 문제 주변을 돌기 시작해요. 책상에서처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요. 답이 안 나와도 최소한 문제의 모양은 다르게 보입니다. 걱정을 곱씹는 것과 생각이 흐르는 것의 차이를 몸으로 알게 돼요.
러닝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의 특징은 샤워 아이디어와 같습니다. 그 순간엔 선명한데 집에 오면 증발해요. 그래서 러너들은 각자의 포획 도구가 있습니다. 신호 대기 중에 폰 메모에 단어 몇 개 치기, 음성 메모로 한 문장 남기기, 이어폰 끼고 있다면 음성 비서한테 메모시키기.
거창하게 적을 필요 없이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열쇠 단어면 충분합니다. '예산 순서 반대로' '그 사람한테 먼저 연락' 같은 것들요. 러닝이 생각을 만들고 메모가 생각을 보관하는 분업입니다.
반대의 날도 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고 그냥 발소리와 숨소리만 이어지는 러닝이요. 이런 날을 허탕으로 여길 필요 없어요. 생각이 쉰다는 건 뇌가 정리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러닝 중엔 텅 비었는데 그날 밤이나 다음 날 아침에 정리된 결론이 불쑥 올라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확실한 건 하나예요. 책상 앞에서 안 풀리는 문제를 붙들고 한 시간을 더 앉아 있는 것보다, 그 한 시간에서 30분을 떼어 뛰고 오는 쪽이 답을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 러닝화가 가끔은 제일 좋은 문구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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