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정리를 하다 보면 서랍 깊은 곳에서 메달이 나와요. 리본은 색이 바랬고, 대회 이름은 이제 로고도 가물가물한데, 손에 쥐는 순간 이상하게 그날의 공기가 딸려 올라와요. 출발 전의 쌀쌀함, 반환점의 바람, 마지막 직선주로의 함성 같은 것들이요.
버리는 물건의 기준이 '다시 쓸 일이 있는가'라면 메달은 진작 버려졌어야 해요. 다시 쓸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메달은 매번 살아남아요. 그건 메달이 물건이 아니라 저장 장치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날 하루가 통째로 담긴 저장 장치요.
이상한 건, 메달을 볼 때 떠오르는 게 완주 기록이 아니라는 거예요. 몇 시간 몇 분에 들어왔는지는 가물가물한데, 30km 지점에서 다리가 멈췄던 순간이나, 낯선 관중이 배번호의 이름을 불러줬던 순간은 선명하죠. 힘들었던 구간일수록 더 또렷하게 남아 있고요.
기록증은 그날의 숫자를 저장하지만, 메달은 그날의 장면을 저장해요. 그래서 기록이 아쉬웠던 대회의 메달도 버려지지 않는 거예요. 그 메달엔 기록 대신, 그만 뛸 뻔했다가 끝까지 간 사람의 오후가 들어 있으니까요.
메달이 서랍에서 나왔다면, 다시 넣지 말고 걸어보세요. 현관 옆이나 책상 위처럼 매일 지나치는 자리에요. 문구점에서 파는 후크 몇 개면 충분하고, 메달이 여러 개라면 벽걸이 행거 하나로 작은 전시가 됩니다.
자리의 힘은 생각보다 커요. 뛰기 싫은 날 현관에서 메달과 눈이 마주치면, 그날 하루를 끝까지 통과했던 내가 시위하듯 걸려 있는 거예요. 지난 기록이 다음 러닝을 데리고 나가는 셈이죠. 서랍 속 메달은 과거지만, 벽에 걸린 메달은 현재진행형이에요.
메달을 못 버리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미래에 있어요. 메달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새 다음 대회를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든요. 하나뿐인 메달 옆의 빈자리가 자꾸 눈에 밟히는 거죠. 수집욕이라고 놀려도 할 수 없어요. 그 빈자리가 러너를 계속 뛰게 만드는 게 사실이니까요.
메달은 끝난 대회의 증거이면서 다음 대회의 예고장이에요. 그러니 버리지 못하는 게 당연해요.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오늘 밤에도 어느 방 벽에서 메달 하나가 다음 주말의 러닝을 조용히 데리러 오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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